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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징, 원시 소금계곡의 다랑이 염전들

라파엘/표종환 2012. 9. 25. 18:38



나의 티벳일기 4: 옌징, 원시 소금계곡의 다랑이 염전들

나의 티벳일기 4: 옌징, 원시 소금계곡의 다랑이 염전들

티베트 소금계곡의 마지막 마방-드라마 주몽에서 나오는 소금산

<티베트 소금계곡의 마지막 마방>
1. 문명교역로의 요충지, 옌징.
티베트고원 동부. 깊은 협곡에 인류의 가장 오래된 제염방법 그대로 소금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 소금을 말에 싣고 험준한 산맥을 넘는 소금 마방이 있다. 윈난성과 경계한 티베트 망캉현의 옌징. 마을 이름도 소금우물이다.
수천년전부터 사람들은 메콩강 상류인 란창강 협곡에 소금우물을 파고, 협곡의 절벽에 나무기둥을 대어 염지(鹽池)를 만들었다. 협곡의 절벽에 기대어 있는 염지들, 소금물동이를 지고 아슬아슬하게 절벽을 오르내리는 여인들, 말과 야크를 몰고 소금을 구하러 오는 유목민들, 그리고 고원 목장 마을로 소금을 팔러가는 마방들...
문명시계의 태엽을 수 천 년 전으로 되돌리는 소금계곡 사람들의 오랜 삶의 풍경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된다. '티베트 소금계곡의 마지막 마방'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생필품인 소금을 만들고 그 가치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통해 소금과 인간 - 인류문명의 길, 그 원형을 찾는 인문지리 다큐멘터리다.
2. 대협곡에서 마방을 만나다.
윈난성 샹그릴라현에서 티베트 라싸까지 가는 차와 마방의 길, 차마고도는 실크로드보다 더 오래된 차(茶)교역로로, 문명 교류의 통로였다. 윈난성에서 티베트로 가는 란창강 협곡의 길에서 류스어(밧줄로 강을 건너는 외줄다리)에 의지하여 양과 말, 자전거를 안고 거센 물살을 건너는 협곡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협곡의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진 조로서도(새와 쥐의 길)를 지나가는 한 무리의 마방을 만난다. 마방(馬 )은 '사람을 도우는 말의 무리'란 뜻으로, 사막의 캐러밴과
같은 운송조직이자 상업집단이다. 마방의 주요 운송 물품은 다름 아닌 차와 소금이다. 최근 길이 닦이고 차가 들어오면서 수천년을 이어오던 마방의 전통은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사라져가는 마지막 마방에 대한 기록이다.
3. 인류와 소금의 역사를 말해주는 옌징의 소금계곡
옌징은 이 일대 사람들은 물론 동물들에게도 생명의 우물이다. 이 생명의 우물은 수많은 전설을 만들어냈고 이를 얻기 위해 수많은 왕조가 전쟁을 벌였다. 옌징에서 소금 만드는 일은 여자의 몫이다. 여자들은 란창강 변 소금 우물에서 물을 길러 등에 지고 가파른
절벽에 기대고 있는 염지까지 나른다. 염지를 떠받치고 있는 나무기둥들에서 세월을 느낀다.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나 제염방식은 원시적인 모습 그대로다. 소금계곡 사람들은
생명의 기본 원소로서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던 소금의 가치를 말해주는 마지막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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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계곡을 벗어난 마방의 행렬이 오르막을 올라 루띵마을로 가고 있다.
옌징에 도착했다. 한자로는 염정(鹽井), 소금우물이란 뜻을 지닌 곳이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주몽>에서 ‘고산국 소금산’이 어디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지명의 의미만 따져볼 때 옌징의 소금계곡이 드라마상의 ‘고산국 소금산’과 가장 흡사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드라마에 나오는 ‘고산국 소금산’은 가상의 지명이 분명하지만, 부여가 존재했던 기원전 1세기보다 앞선 기원전 2세기(중국의 왜곡된 기록에도 이미 기원전 2세기에 티벳 부족이 등장하는데, 이미 그 이전부터 티벳 고원에 이들이 살고 있었다) 이전부터 부족 형태의 티벳이 존재했고, 옌징의 소금계곡 또한 티벳 부족이 이것을 차지하기 위해 나시족과 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때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드라마 <주몽>에서 가상의 지명으로 거론했을지언정 그 시기의 ‘소금산’이라 불릴만한 소문난 소금 생산지는 티벳의 옌징만한 곳이 없었다.
말이 지는 소금짐의 무게는 약 60~70킬로그램, 균형을 위해 마부는 정확하게 무게를 재고 싣는다.
어쨌든 옌징은 오랜 옛날부터 소금으로 유명했고, 이 곳에서 나는 소금은 중국의 윈난과 쓰촨, 티벳 고원의 중심부인 라싸는 물론 인도에까지 폭넓게 거래되었다. 때문에 차마고도 교역로에서 옌징이 차지하는 비중은 차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더구나 고대국가 시대에는 소금이 곧 칼이었고, 권력이었으며, 부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 값진 소금을 바다가 아닌 내륙 깊숙한 협곡에서 생산한다는 것도 옌징의 소금을 유명하게 만든 또다른 이유였다. 정확한 기록은 나와 있지 않지만, 이 곳 염전의 역사는 부족국가시대인 수천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직도 그 때의 원시적인 소금생산 방식을 고스란히 유지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원시적인 소금생산방식을 유지해오고 있는 옌징의 소금계곡. 수백여 개의 다랑이 염전이 있다.
옌징의 소금 계곡은 란창강이 흐르는 협곡에 자리해 있다. 이 소금 계곡을 챠카룽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옛날에는 강을 사이에 두고 나시족 마을과 티벳족 마을이 분리, 대립하고 있었다. 옛 전설에 따르면 티벳족과 나시족(納西族)은 소금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오랜 쟁탈전을 벌였다고 한다. 요즘에야 이런 대립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나시족과 티벳족은 소금 계곡의 염전을 나누어 차지하고 있다. 옛 기록상에는 이 곳의 염전이 50여 개에 이르며, 여기서 나는 소금은 차마고도 교역의 중요한 거래품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현재는 소금 계곡에 수백여 개의 염전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모양은 마치 계단식으로 펼쳐진 다랑논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건 그냥 다랑논이 아니라 오랜 세월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눈물의 소금밭이다. 하나의 염전은 수많은 나무기둥과 받침대로 이루어져 있다. 빼곡하게 세운 나무받침 위에 돌과 흙을 깔고 그 위에 또 고운 진흙을 이겨 미장을 하고 두렁을 높여 염전을 만드는데, 이 염전들이 수백여 개 어울려 다랑이진 풍경이 오늘날 소금 계곡의 모습이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 곳의 소금 생산 방식이다. 약 1억년 전 해저의 땅이었던 지금의 티벳 고원은 두 개의 대륙판이 부딪쳐 융기한 곳으로, 옌징의 천연한 소금 광산은 그것의 가장 확실한 증거물인 셈이다. 그 옛날 해저에 잠겨 있던 소금 성분은 챠카룽의 몇몇 곳에 샘솟는 온천수에 의해 지표로 솟아나는데, 이 물을 증발시키거나 여과시킨 것이 이 곳의 소금이다.
소금 계곡의 다랑이 염전. 소금물을 길어오는 소금 우물은 따로 있다.
이런 전통방식의 소금 생산과 다랑밭처럼 이뤄진 독특한 염전지대로 인해 국내외 많은 전문가들은 중국 정부에 세계문화유산 신청을 건의하고 있지만, 중국은 딴청을 부리고 있다. 이유인즉슨 소금 계곡이 있는 곳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란창강에 곧 수력발전댐 건설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옌징의 소금 계곡이 수장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수천년을 대대로 이어온 이 곳의 전통 소금 생산은 최근 들어 위기를 맞고 있다. 바다에서 생산한 미네랄이 풍부한(사실 옌징에서 생산한 소금에는 갯벌에 많은 마그네슘 성분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다) 소금이 싼값에 대량으로 유입되고 있어 경쟁력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래저래 소금 계곡의 운명과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이 곳의 수백여 개 다랑이 염전은 엄청난 양의 나무기둥과 받침이 떠받치고 있다.
내가 옌징에 도착한 것은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시골 읍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옌징의 중심가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차는 거의 보이지 않는데다 거리에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사람들은 등짐을 진 말들을 끌고 어디론가 총총이 사라졌다. 시내 한복판에는 ‘차마고도 주점’도 있었는데, 꽤 오랫동안 차마고도 주막 노릇을 해 왔는지 허름하고 오래된 옛빛이 역력했다. 시장은 과거 우리네 장옥같은 분위기가 났고, 소쿠리며 호미, 삽, 야크방울 같은 물건들이 난전에 나와 있었다. 옌징에는 나시족과 티벳족(뵈레)이 어울려 산다고 하는데, 사실 내 눈으로는 잘 구별이 가지 않는다. 다만 좀더 얼굴이 검고 억세 보이는 쪽이 티벳족이라고 여겨질 뿐이다.
옛날 소금과 차를 교역하던 마방들이 들러가던 '차마고도 주점' 오른쪽에 간판이 붙어 있다.
밥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는 티벳족이라고 밝힌 띵정장춰(31) 가족을 만났다. 이 가족들은 동충하초 파는 일을 한다고 했다. 바이망 설산 인근에서도 여러 명의 동충하초 장사꾼을 만났듯 옌징에도 동충하초 장사꾼이 꽤 있다고 했다. 동충하초는 어디서 캐는가? 망캄 가는 길에 훙라 설산이 있다. 거기에 동충하초가 많다. 그럼 이건 어디다 내다 파는가? 중띠엔까지 가서 판다. 버스를 타면 중띠엔까지 3일이 걸린다. 그렇게 멀리까지 가는가? 지금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옛날에는 말 타고 중띠엔까지 갔다고 들었다. 동충하초는 얼마나 하는가? 500그램에 200위안이다. 그걸 캐는데는 얼마나 걸리나? 500그램 캐는데 두세 달 걸린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2만 5천원을 벌기 위해 두세 달이나 산을 헤매다녀야 하는 게 동충하초 장사꾼의 현실인 것이다.
옌징의 가장 큰 호텔에 짐을 풀고 TV를 켰지만, CCTV1밖엔 나오지 않는다. 오늘은 독일월드컵 한국과 토고전이 있는 날이었지만, 중계방송이 나오는 CCTV5는 시내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하긴 티벳에까지 와서 월드컵을 보겠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리라. 티벳에 온 이상 티벳의 시간을 따라야 한다. 티벳의 시간은 비유하자면, 말과 야크가 걷는 속도로 흘러간다. 한국에서는 서울에서 목포까지 4시간 반이 걸리지만, 여기서는 그 정도의 거리를 가자면 꼬박 하루가 걸린다.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우리는 한 시간 늦는 것에 안달을 하지만, 여기에서는 한 시간쯤 늦는 것은 늦는 것도 아니다. 비행기도 제 시간에 떠나는 적이 없고, 버스는 아예 시간표가 무의미하다. 티벳에서 급하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한국 사람들이다.
티벳의 시간은 말과 야크가 걷는 속도로 흘러간다.
아침 일찍 어제 보지 못한 염전을 보러 란창강을 향해 간다. 멀리 산등성이에 자리한 루띵마을이 안개를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절벽과 벼랑 아래로 황토색 란창강이 거칠게 흘러간다. 그런데 절벽을 따라 가로로 길게 실오라기처럼 이어진 것이 있다. 길이다. 까마득한 벼랑에 걸린, 한발만 삐끗하면 바로 란창강이 집어삼키는 위태로운 길이다. 그 위태로운 길을 건너편에서 보고 있자니 내 오금까지 저려온다. 염전을 향해 조금 더 협곡을 내려가자 아, 입이 쩍 벌어지는 풍경이 펼쳐진다. 건너편의 실오라기같은 길로 10여 마리의 말이 소금짐을 싣고 간다. 그 뒤로는 마방(말이나 노새, 당나귀를 이용해 차와 소금 등을 거래하고 운반하던 상인조직)으로 보이는 세 명의 마부가 뒤따르고 있다. 사실상 옌징에 남은 마방은 옛 차마고도의 전통을 지키는 마지막 마방이나 다름없고, 옌징을 마지막 근거지로 삼고 있는데, 당연히 이 곳의 소금이 그들의 전통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위태로운 낭떠러지 벼랑길을 걸어서 마방들은 루띵마을로 간다.
소금 짐을 싣고 궁궁을을 뻗친 오르막을 다 올라온 마방의 행렬은 루띵마을로 이어진 낭떠러지 벼랑길을 위태롭게 이동하고 있다.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벼랑길에서 마부들은 짐을 싣지 않은 말일지라도 절대로 타지 않는다고 한다. 고원에 부는 잦은 회오리바람에 말이 몸을 가누지 못해 마부를 벼랑으로 떨어뜨렸다는 웃지 못할 사건이 이 곳에서 종종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실 옛 차마고도의 길이 대부분 저랬다고 보면 맞다. 해서 차와 소금을 나르던 마방들이 숱하게 길에서 죽어야 했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마방의 행렬이 루띵마을까지 무사히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소금 계곡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곳에서는 증발지 소금(오른쪽)보다 여과를 통해 고드름처럼 달린 소금(왼쪽)이 더 유명하다.
에움길을 돌아서자 말로만 듣던 다랑이 염전이 눈앞에 펼쳐졌다. S자로 휘돌아나가는 란창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 계곡에 빼곡하게 들어선 것들이 모두 염전이다. 염전을 바로 발 밑에 두고 소금을 나르는 소금꾼의 행렬도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바로 내 눈앞에서 말들을 몰고 산길로 올라섰다. 이 곳이야말로 말이 걷는 속도로 시간이 흘러가는 곳이다. 나도 천천히 말이 걷는 속도로 염전에 도착했다. 사내들은 보이지 않고 몇 명의 아낙들만 염전을 오가며 두렁에 미장을 하고 있었다. 우기에 내린 비가 상당수의 염전을 망쳐놓았기 때문이다.
다랑이 염전 두렁에 미장을 하고 있는 나시족(추정) 여인.
- 여기에 소금 우물이 정말 있는가?
- 온천처럼 소금물이 솟아나온다. 물동이로 그 물을 퍼서 날라다 소금연못(1차 염지)에 채우고, 그 물을 다시 소금밭에 붓는다.
- 이 흙바닥에 그냥 부으면 소금이 더럽지 않은가?
- 그 위의 소금은 주로 가축에게 먹인다(물론 이 소금이 가축을 위한 소금은 아니지만, 티벳인들은 이 소금이 가축의 다산을 돕는다고 믿는다).
- 그럼 사람은?
- 이 아래(나무기둥이 받치고 있는 곳)를 보라. 저기 고드름처럼 매달린 것이 보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수확한다.
- 그렇다면 이 위의 소금밭은 증발지가 아니라 여과지란 말인가?
- 그렇다. 여기에 소금물을 부으면 일부는 위에서 증발하고, 일부는 이 밑으로 스며들어 저기 천장(밑에서 봤을 때)에 고드름처럼 매달리게 된다.
- 그럼 이 소금밭은 당신 것인가?
- 내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여기(여러 구역 중 한 구역을 가리킴)의 소금밭을 모두 스무 가족이 같이 운영하기 때문이다.
- 공동소유?
- 그런 셈이다. 한때 이 곳의 소금밭은 중국에 의해 국영으로 운영(중국이 티벳을 점령한 이후 모든 것은 대부분 국영으로 운영되었으며, 80년대 이후 민간에도 조금씩 양도되었다)된 적도 있다. 다시 우리에게 넘어온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 남자들은 왜 보이지 않는가?
- 나도 모르겠다.

옌징의 미래는 이 아이의 눈처럼 밝지가 않다.
소금밭에서 일하는 소금꾼은 거개가 여자들이다. 남자들은 소금을 나르거나 내다파는 일을 한다고 하지만, 소금물을 퍼나르거나 소금밭을 고르고 생산하는 힘든 일은 대부분 여자가 담당한다. 티벳에서는 도대체 남자들은 뭐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여자가 힘든 일을 도맡아 한다. 옛날 기록에 따르면 나시족은 모든 힘든 일을 여자들이 도맡아 하는 대신, 1950년 이전까지만 해도 철저한 모계사회를 유지해 왔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머니는 알지만, 아버지는 알지 못했으며, 여성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고, 재산이나 아이에 대한 소유권이나 양육권도 여성에게 있었다고 한다. 현재 나시족(중국과 티벳에 현재 2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다)은 진사강과 란창강, 얄룽강 유역에 주로 살고 있는데, 리장에 나시족 자치현이 세워져 있다. 이들은 티벳인들과 달리 지금도 물과 바람, 산과 같은 물신을 숭배하며, ‘동파’라고 불리는 무당이 여전히 존재한다. 과거 일처다부제 생활을 했던 티벳인과 비슷한 면이 많지만, 종교와 생활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난다. 그러나 나시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갔던 나는 염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나시족인지 티벳족인지 알지 못했고,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공부 좀 할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