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風景 그리고 中國

중국 더친(德欽)에서 쩡궁마을 까지 여행

라파엘/표종환 2012. 9. 25. 18:37



나의 티벳일기 2: 더친에서 쩡궁마을까지
비오는 더친 거리의 마부.
중띠엔에서 더친까지의 길은 심한 고도와 굽이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포장구간이 대부분이어서 앞으로 펼쳐질 대책없는 비포장 구간에 비하면 지극히 편한 ‘안전로’나 다름없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도착한 더친(德欽)은 주변의 산자락마다 안개를 친친 감은 채 시큰둥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늙스구레한 사냥꾼 한 명이 활을 어깨에 메고 대로를 활보한다. 등뒤엔 날카롭게 벼린 활들을 여러 촉 꽂은 화살통까지 두른 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하고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순간 나는 저걸 찍어야만 해, 하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보지만, 날이 캄캄해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체만 찍히고 말았다. 그래도 활에다 화살통까지 맨 사냥꾼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의외의 소득을 얻은 셈이다. 내가 보고자 한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누군가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들이라고, 요즘에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들이라고 저만치 던져버린 것들. 어쩌면 나는 그런 것들을 찾으러 티벳으로 향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더친 인근의 산중마을.
약 6만여 명의 인구가 사는 더친은 중띠엔과 마찬가지로 1950년대까지만 해도 티벳 땅이었으나, 중국이 티벳을 강제점령하면서 중국 땅으로 둔갑한 곳이다. 옛날 티벳말로는 ‘아둰쓰’라 불렀는데, ‘태평한 극락의 땅’이란 뜻이다. 아마도 소설 속의 샹그릴라가 그리고자 한 세계를 티벳인들이 먼저 그려낸 ‘마음의 이상향’이 이 곳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지금 도심과 마을 어디에도 ‘샹그릴라’다운 면모는 찾아볼 수가 없다. 애당초 그것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이므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양에서 말해왔던 유토피아와 동양에서 말해왔던 무릉도원처럼 새롭게 생겨난 샹그릴라도 우리의 관념 속에서만 아름다울 뿐이다.
산중마을에서 흔히 만나는 다랑이밭.
나의 여정은 이른 아침 다시 시작되었다. 내가 탄 차는 봉고차였는데, 지프차도 넘기 힘들다는 214번 국도를 어떻게 넘어갈지가 걱정이었다. 가파른 협곡이 계속되는 진장공로 주변은 워낙에 농사 지을 땅이 부족해 약간의 공터만 있으면 층층이 뙈기밭을 일구어 다랑이를 이룬다. 마을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산자락은 다랑이밭 차지가 된다. 더친에서 얼마 가지 않아 만나게 되는 훼이라이스 전망대. 어제 오는 길에 만난 훼이라이스와 오늘 만난 훼이라이스는 수십 킬로미터 이상의 거리가 있었지만, 다들 여기도 저기도 훼이라이스라 부른다. 그런데 정작 나는 훼이라이 사원을 만난 적이 없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내가 만난 것이라곤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쵸르텐 뿐이었다.
메이리 전망대 마을의 쵸르텐.
본래 이 곳은 메이리 설산을 조망하는 최고의 전망대라고 소문이 나 있지만, 지금은 눈앞에 안개에 폭 잠긴 산자락만 감질나게 보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안보이는 메이리 설산을 향해 절을 하고 향을 피운다. 향로에서 피운 곱향나무 연기는 금세 안개와 뒤섞여, 안개에서 은은한 향기가 난다. 향기가 나는 안개! 메이리 전망대 마을을 벗어나 20킬로미터쯤 달리면, 드디어 지루하고 고달픈 비포장 도로가 시작된다. 차는 덜컹거리고 비틀거리고, 툭하면 만나는 산양떼를 피하느라 곡예를 한다. 이 곳의 양떼들은 차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녀석들은 저쪽에서부터 한 발자국도 비키지 않고 곧장 걸어서 온다. 이쪽에서 거칠게 빵빵거려도 저쪽에선 느긋하게 음메거린다. 야크떼는 그래도 약간의 눈치가 있어서 처음엔 안비켜줄 것처럼 곧장 오다가도 빵빵거리면 귀찮다는 듯 몇 발자국 비켜난다. 문제는 몇 발자국만이다. 완전히 비켜나 길을 내주는 것은 야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지 꼭 이 녀석들은 몇 발자국만 비킨다. 나머지는 차가 비켜가야 하는데, 그렇게 서로 반반씩 비키자는 게 아무래도 야크의 철학인 것같다.
메이리 전망대 마을에서 만난 사내.
더친을 지나면서 길이 거슬러온 진사강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대신 란창강(瀾滄江)이 진사강을 대신해 구불구불한 협곡을 접수한다. 비포장길이 시작되면서 산사태의 흔적은 곳곳에 방치돼 있다. 국도가 지나는 산자락의 덩치가 제법 크긴 해도 속은 헐겁기만 해서 도로가 지나간 자리마다 툭하면 토사가 흘러내리고 암석이 굴러떨어진다. 이런 사태는 요즘같은 우기 때는 더욱 심해서 큰 비가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길이 끊기고 앞이 막힌다. 그것이 건설해서는 안될 곳에 건설된 214번 국도의 업보이고, 대가인 것이다. 그 옛날 말을 끌고 지나갔던 마방들이 왜들 그렇게 길에서 죽어야 했는지, 저 산과 계곡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이 길은 애당초 구름과 바람에게나 어울리고, 산짐승에게나 통행이 허락된 자연의 길이 아닌가.
수시로 사태가 나는 214번 국도.
한동안 7~8부 능선을 오르내리던 길은 차츰차츰 고도를 낮춰 란창강에 가까워진다. 급기야 길은 산을 다 내려와 란창강을 바로 옆에 끼고 물길을 따라 흐른다. 그 길에서 만난 한 마부는 내가 출발한 더친에서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여기서 더친까지는 100여 킬로미터 남짓이지만, 장보기가 마땅찮은 이런 오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거기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하긴 이런 길을 자전거를 타고 넘어오는 바이커도 있고, 처음부터 오체투지로 넘는 사람도 있다. “아마 오늘은 못 갈 거다. 저 앞에 길이 끊겼다.” 마부는 그 말을 남기고 떠그덕떠그덕 사라졌다. 길이 끊겼다고?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앞서 가던 마부를 지나쳐 봉고차는 먼지를 날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란창강가에서 만난 마부.
10여 분쯤 란창강을 따라 올라가자 양쪽 길가에 수많은 차들이 도열해 있었다. 마부의 말이 맞았다. 그 중의 상당수는 돼지를 싣고 온 트럭들이었다. 돼지는 졸고, 꽤액거리고, 꿀꿀거렸으며, 아예 길가에 드러누워 팔자 좋게 낮잠을 즐기는 돼지도 있었다. 길은 언제쯤 뚫리는가? 모른다. 여긴 언제부터 있었는가? 어제 왔다. 그럼 여기서 밤을 보냈단 말인가? 그렇다. 여기가 무슨 마을인가? 쩡궁마을이다. 사람들은 다들 오늘 안가도 상관없다는 듯 느긋했다. 마치 여기가 숙소인 것처럼 한쪽에선 카드를 치거나 마작을 즐겼고, 한 편에선 컵라면을 먹거나 삐루를 마셨다. 한 외국인 부부(이 부부를 드락순쵸에서 다시 만난다)는 길가 통나무에 걸터앉아 주변의 분위기에는 아랑곳없이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다.
길이 막힌 쩡궁마을(왼쪽). 다리에 옌러우를 내걸고 있다(오른쪽).
졸고, 기다리고, 하품하고. 몇 시간이 될지, 아니면 하루가 될지, 이틀이 될지 알 수 없었다. 며칠 전 내린 폭우로 전방에 토사가 흘러내려 길이 끊겼고, 지금은 그로 인해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만이 확실했다. 여기서 티벳에 가려면 다른 길이 없었다. 다시 길을 돌아나가 칭해성까지 가서 칭장공로를 타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여기서 또 2~3일이 걸리는 일이다. 기다림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마 며칠이 될지도 모른다. 마치 나는 평생을 여기서 기다려 할것만 같았다. 아까 길에서 우연히 만난 마부가 내 앞을 지나쳐 간다. 마부는 때로 말이 차보다 빠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유유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막히지 않고 집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란창강가에 걸터앉아 두 시간째 강물소리만 듣다가 일어났다. 란창강을 가로지르는 출렁다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리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들은 방금 잡은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여 다리에 내걸고 있었다. 냉장고나 냉동고가 없는 이들로서는 빙산에서 흘러왔을 차가운 강물의 수면 위쪽이 일종의 냉장고인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걸어놓은 고기들도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다. 이들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옌러우’라고 하는데, 이렇게 바람에 말렸다가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쓴다. 저렇게 허공에 매달아 놓아도 아주 썩지는 않는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코담배.
차가 막혀 가지 못하는 쩡궁마을은 모두 35가구(150여 명이 사는)가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마을이었는데, 위쪽 산마을에는 13가구가 살고 있었다. 마을 구경이나 하자고 올라간 산마을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개울가에 나앉은 마을 사람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온 나를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이내 경계심을 풀었다. 할머니 한 분이 손에 들고 있던 코담배를 권했다. 황토색 분말이 담긴 작은 담배 쌈지에서 향긋한 담배향이 났다. 뒤늦게 윗집에서 나온 여자 아이는 불청객을 보자 수줍음을 타는지 엄마 등에 매달려 고개를 묻는다. 이따금 고개를 들 때마다 아이는 수줍게 웃었는데, 입 주변과 이가 모두 새카맣다. 군것질을 따로 할 수 없는 이 곳의 아이들은 ‘하이궈’라는 검은 산열매로 주전부리를 대신한다. 하이궈를 한 주먹 다 먹고 나면 저렇게 입 주변과 이가 새카맣게 변하는 것이다. 메이리 전망대 마을에서 나도 이것을 한 움큼 먹어봤는데, 머루와 버찌를 섞은 듯한 기묘한 맛이 났다.
쩡궁마을의 마굿간.
이 곳의 집들은 그 구조가 제주도와 흡사했다. 집과 헛간이 따로 분리돼 있었고, 마당에는 한결같이 마굿간과 돼지우리가 있었다. 이 마굿간과 돼지우리는 닭장의 노릇도 겸했는데, 우리 구석에는 나뭇가지를 결어 만든 닭둥우리가 걸려 있었다. 헛간에 걸친 사다리도 우리와 똑같았다. 통나무를 중간중간 도끼로 쪼아내 만든 이 사다리는 오래 전 경주 양동마을에서 본 것과 너무나 흡사했는데, 집집마다 이런 사다리가 두어개쯤은 있었다. 부엌에는 어느 집을 가든 쑤우오차(야크버터차)를 젓는 차통이 있었다. 차통은 큰것일 경우 거의 1미터에 이르렀다. 두어 시간을 산마을에서 보내고 다시 차가 있는 곳으로 내려와보니, 여전히 차들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아침에 도착해 저녁이 다 되도록 길은 열리지 않았다.
쑤우오차.
돌아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2시간을 달려서 다시 메이리 전망대 마을로 왔다. 저녁 8시가 되었는데도 날은 훤하게 밝다. 본래 티벳은 북경과 서너 시간의 시차가 있음에도 북경 시간을 표준시로 삼고 있다. 해서 라싸에서는 9시쯤에야 노을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여기도 별로 다를 게 없어서 8시가 훨씬 넘어서야 날이 어두워졌다. 느긋하게 메이리 설산이나 구경하고자 찾아들어간 카페에서는 한창 쑤우오차를 만드는 중이었다. 차통에 가락을 꽂아 젓고 있는 카페 주인에 따르면 야크 버터를 넣고 이렇게 100번 이상을 저어 주어야 차가 된다고 한다. 처음 맛보는 사람들은 야크 냄새 때문에 고개를 가로젓지만, 먹다 보면 제법 고소하고 맛있다.
당나귀의 아침식사.
아침으로 쌀죽과 티벳빵인 둥그런 ‘빠바’를 두 개나 씹어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식당 주인은 아직도 길이 열리지 않았다며 점심 때나 가라고 했지만, 가는 길에 메이리를 좀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밍융마을이라도 구경하고 가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214번 도로에서 빠져나와 란창강을 건너가야 하는 밍융마을은 지연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밍융빙천’(明永氷川) 즉, 밍융 빙하를 여기서 만날 수 있는데, 이 곳은 세계에서도 해발이 가장 낮은 2650미터에서도 빙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빙하를 보려면 밍융마을에서도 말을 타고 2시간은 산을 올라가야 한다. 왕복 4시간이면, 쩡궁마을의 길이 뚫려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밍융빙천을 품은 메이리는 윈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더친은 물론 윈난과 티벳 남동부에서도 최고의 성스러운 산으로 통한다. 옛 티벳어로는 ‘흰 봉우리’란 뜻의 ‘카와거보’(6740미터)라 불리는데, 주봉은 워낙에 험해서 등정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밍융마을에서 만난 마니차 돌리는 노인(왼쪽)과 수차처럼 돌아가는 마니차(오른쪽)
결국 밍융빙천 구경을 포기하고 다시 쩡궁마을로 왔다. 트럭의 행렬은 여전히 길가에 도열해 있다. 길은 뚫렸나? 아직. 언제 뚫리나? 곧. 트럭 운전수 한 명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봉고차는 트럭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내달렸다. 바로 앞에서 불도저 한 대가 힘겹게 흘러내린 토사를 치우고 있었다. 거의 공사는 마무리 단계였다. 봉고차는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불도저가 옆으로 비킨 틈을 타 울퉁불퉁 질척거리는 길을 지프차처럼 넘어갔다. 휘유우~.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 입에서 모두 한숨이 터져나왔다. 드디어 길이 열렸다.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기다려 길이 열린 것이다. 낮 12시 16분. 이제 다시 티벳으로 간다.
--- 3편에서 계속. 글/사진: 이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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